41세 인당(印璫, ~1356)은 1351년(충정왕 3) 서강(西江, 예성강)에 침입한 왜구를 포획하였고, 1354년(공민왕 3)에도 전라도만호로서 왜구를 격파하여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년 후인 1356년 6월에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원(元)나라 영토인 파사부(婆裟府, 현재 중국의 단둥) 등 3참(站)을 격파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구실로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위협하자, 고려 조정이 굴복하여 인당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였다.
인당의 장남 안(安)의 후손 일부[司直公派]가 현재 홍성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3남 해(海)의 아들 원보(元寶)는 고려 우왕(禑王) 때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원보는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이후 최영(崔瑩)을 유배시킬 때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함창(咸昌)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화(禍)를 입어 죽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함산군(咸山君)에 봉하였다.
원보의 아들 44세 인경(仁敬)이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근(瑾)의 후손들이 현재 충남 내포지역 일대에서 세거하고 있고, 6남 금생(金生)의 후손들은 보령(保寧)에 세거하고 있다.
근은 철수(鐵壽), 철형(鐵衡), 철숭(鐵崇), 철관(鐵寬), 철손(鐵遜) 등 아들 5명을 두었다. 근의 장남 철수의 아들인 47세 원손(元孫)이 분순교위(奮順校尉)를 지냈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교위공파(校尉公派)로 분류하고, 온양·천안 등지에 세거하고 있으며 인경과 원손의 묘소가 아산(牙山)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교동인씨 송헌공파 삼석과 후손들의 묘.
근의 3남 철숭의 장남 삼식(三植)의 후손들이 판관공파(判官公派)로 고덕면 상궁리 양촌(陽村)에 세거하고 있고, 차남 삼석(三錫)의 후손들이 송헌공파(松軒公派)로 덕산면 낙상리와 삽교읍 용동리에 세거하고 있다. 그리고 근의 4남 철관의 후손들은 당진시 면천에서 세거하고 있다.
예산 지역에 거주하는 교동인씨는 대부분 삼석의 후손으로 송헌공파에 해당된다. 삼석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장남 성장(成章)의 후손들이 덕산면 낙상리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호군(護軍)을 지낸 차남 성문(成文)의 후손들은 삽교읍 용동리에 분포되어 세거한다.
용동리는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龍頭)’라고도 불려진다. 성문의 네 아들 중 장남 사정(士鼎)의 후손들은 용동리 하룡(下龍)과 송산(松山), 차남 사풍(士豊)의 후손들은 신동(新洞), 3남 사수(士隨)의 후손들은 중룡(中龍), 4남 사진(士震)의 후손들은 상룡(上龍)에 세거하고 있다. 2011년 용동리 마을의 중앙 동남쪽 기슭에 ‘교동인씨 송헌공파 삼석과 후손들의 묘’를 조성하여 봉분 하나에 삼석으로부터 9위와 부인까지 합동으로 모셨다.
사정의 손자 인초선(印楚璿, 1606~1669)은 무과에 급제한 후 만호(萬戶)를 지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에 인질로 갈 때, 학가(鶴駕, 세자의 행차)를 따라 가서 심양(瀋陽)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후에 효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의 묘소가 하룡 끝자락에 서북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상룡의 동남쪽 기슭에 있는 ‘배나다리 성지’는 순교자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의 사적지이다. 인언민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에게 교리를 배우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야고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후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공주(公州)로 이주하였으나, 1799년 포졸에게 체포된 후 갖은 형벌과 문초를 받다가 해미 진영(鎭營)에서 순교하였다.
죽음에 이르면서도 “그렇고 말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라고 되뇌이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 124위 시복미사’에서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되었다.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3·1운동 때에는 인한수(印漢洙, 1881~1919)가 4월 3일 고덕면 대천 장터에서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 때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휘두른 총검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말을 타고 있던 일군 수비대장에게 달려들어 말에서 끌어내려 내동댕이치자 말에서 떨어진 수비대장이 군도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79호에 안장하였다.